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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행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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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1-04 16:43 조회1,2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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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행담.

 

제산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글 쓰는 솜씨가 자신과 닮았고 얼굴도 깡마르고 못생긴 것이 닮았으며 修道를 좋아하며 학문을 추구하는 정신도 같을뿐더러 성격이 뻴쭉 난 것도 자신을 닮았다는 것이었다.

뻴쭉 났다는 말은 선생님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비판적이며 도도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뜻일 것이다.

 

이어,

바위도 펑퍼짐하면 사람들이 앉아 놀기는 좋지만 역사에 남길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으며 금강산 뾰족한 바위는 앉아 쉬지는 못해도 역사에 기리 남기는 사진을 찍는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대중적이지는 못하지만 정신은 기리 남길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자연을 비유하시며 재밋게 말씀하시는 것이 편했고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다.

 

그 날도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귀가하려는데 내일을 기약하지 않으셔서 후일을 기약하고 집을 나섰다.

 

다음날 아침 미아리 숙소로부터 출근하여 공부방에 들어서자 선생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엔 휴대폰이 없었으므로 집이나 사무실에 가야만 통화가 가능했던 시절이다. 이날도 만나자고 하시면서 선생님께서 직접 신촌 공부방으로 오시겠다는 것이었다.

 

이틀이나 사무실을 비웠기 때문에 나를 찾아온 問客十餘名이 대문 앞에 기다리고 있었지만 반갑지 않았고 미숙한 지식으로는 양심상 고객 상담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며 막무가내로 떠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도착하실 때까지 두어 시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안에 있었는데 손님들은 그때까지도 발걸음을 옮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相學이나 占斷學으로 問客의 궁금증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선생님의 通辯을 들은 이상 인생 상담을 한다는데 겁이 났고 나는 이제부터 다시 공부를 해야 하므로 상담을 할 수 없다고 재차 돌아가라고 하자 이구동성으로 아우성이었다. 그 중에는 무당들도 있었고 동대문 등 먼 곳에서 나를 만나러 왔던 것인데 나는 공부가 부족하니 공부 좀 더하고 오겠노라고 하자 대부분의 顧客은 자기는 어느 선생보다 나에게만 상담을 하겠노라고 억지를 쓰기도 하였다. 사실 이후로는 나 개인적으로 서울에서의 人生相談은 일절 하지 않았다. 이런 결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蘭明學은 탄생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회고해본다.

 

그럭저럭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제산선생님이 도착하셨던 것이다.

기다리던 고객들에게 좋은 시험대가 되었으니...

 

中間 人事紹介말에서 누락된 내용이 있다.

박장열군이 나를 제산선생님께 소개할 때 선생님께서는 나의 수입이 어느 정도나 되느냐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박군은 거의 매일같이 내 공부방에 들리곤 하였으며, 박군의 생활이 그다지 여유롭지 못했으므로 내가 가끔씩 점심 값과 용돈도 주었고 지하철 정기권도 사주곤 했던 터였으므로 사무실 운영에 대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月收入 150만원 정도는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 제산선생님께서는 1970년부터 부산대신동에서 고객상담을 하셨고 1976년도(丙辰年)부터는 부산상담실을 정리하고 中山後學에게 사무실을 넘겨주고 떠나계시면서 간간 부산에 내려와서 한두 달씩 고객을 상담하시며 쉬고 있던 중이었는데 다시 부산에 내려와 본격적으로 고객 상담을 시작하려고 하던 중이었으므로 代筆書記를 물색하고 있던 중 나를 채용하여 연구도 하면서 함께 지내볼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선생님께서 大衆相談을 다시 하시려는 사정이 있었으니 쉬고 있는 동안 동주건설이란 회사를 전두환정권에서 밀려난 김장군과 1981년도에 동업을 하다가 실패하므로 수억 원대의 재산상 손실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점에 관해서는 후일 상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다.

 

나는 스승을 원했던 시기였고 선생님은 書記를 필요로 하고 있던 중이었으니 서로가 필요에 의하여 찾던 사람들을 만나기에 이른 것이리라. 그래서 수입에 맞춰 보수를 지급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내가 보내드린 般若心經 글씨체를 보시고는 아쉽지만 그만하면 대필서기로 채용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는 박군의 의견을 들었다.

 

각설하고...

제산선생님이 내 사무실에 도착하셨을 때까지 손님들은 떠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선생님께 사정을 이야기 하니 선생님께서 감명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내심 반색하며 霽山學의 진수를 경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접수를 시작했는데 그날은 5~6명만 상담하시겠다고 하셨으므로 원하는 6명의 카드를 작성했고 나머지는 다음날 시간이 되면 상담해 드리겠다고 돌려보냈다. 나는 당시 한사람 상담료를 5천원 받을 때였고 서울 장안에서도 대부분이 5천원이었으며 관록이 있는 분도 1만 원 이상 받는 術客은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제산선생님의 상담료는 한사람에 3만원이었으니 웬만한 손님은 부담스러워 했을 것이나 내가 앞으로 스승으로 모실 분이라고 하니 나와 비교 하려 고는 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어떤 분은 제산선생님보다 나에게 상담하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제산선생님을 만난 이후로는 新村에서 일체 고객 상담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2일 연속 11명의 감명을 하게 되었고 틈나는 대로 여러 사람들을 감명해주게 되었는데 상담료가 비싸다고 불만 하는 고객은 한분도 없었다고 기억된다. 이날부터 며칠간 제산선생님은 신촌 사무실로 나오셔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며 감명도 하게 되었으므로 [여관집 부인가출사건]의 주인공도 만나게 되어 제산학과 관상학의 비교평가를 하기에 적절했던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선비가 상담료를 논하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지만 당시의 상황을 솔직히 기록하고자 하는 뜻이므로 독자의 양해를 바라는 바이다.

 

상담내용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物像論 통변을 접하고 깊이 깨닫는 바가 있었으며 당시만 해도 나는 기억력에 있어서는 누구에게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하였고 一讀知十의 총기를 발휘하여 제산학의 門中秘傳에 일취월장하였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因緣法, 직업인연, 물상통변, 格局 用神의 활용법, 신살통변, 주거인연 등 새로운 이론에 매료되었던 것이 사실이며 자연이치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전개되는 새로운 이론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히 염원으로만 갈구하던 自然觀이 나의 적성에 흡족했었다는 솔직한 심경이다.

 

당시 대부분의 철학관에서는 돈 벌기 위한 수단으로 부적을 쓰기도 했고 살풀이 등으로 혹세무민이 난무했던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물론 지금도 그런 부류의 술객들이 수다하지만 당시 나는 觀相學이 주류였으므로 관상학으로는 살풀이가 없으므로 부적 따위에는 관심도 수단도 없었다. 그러나 부적에 관한 연구는 계속했었고 부적에 관한 서적을 많이 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과연 부적의 신통력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남달리 컸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술객들이 부적을 판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도 내가 아는 여러분들은 부적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의 통변 중에서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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