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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修行의 길]門中修學 好事多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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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2-02-20 16:47 조회1,3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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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修行의 길]門中修學 好事多魔

 

언제나 호사다마라 했듯 행복했던 시간들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왜냐면 서울이나 부산에 있는 술객들이 찾아오면 그날은 강의를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김민정씨와 김동석씨도 찾아왔으며 배울것이 없다고 떠났던 백거역씨도 수시로 찾아왔고 부산에 있는 이름모를 술객들이 자기네 안방 드나들 듯 찾아왔던 것이다.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더. 그렇지만 이런것도 마장이며 공부할 때는 九難十魔가 따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보다 더 힘들고 험난한 역경이 와도 극복해야 했다.

 

여기서 이야기는 잠시 뒤로 하고 선생니의 수행과정을 내가 아는 만큼 소개하려 한다.

 

선생님은 20대 초반부터 수행의 길을 걸으시며 언제 득도한다는 약속도 보장도 없이 청춘을 바쳐가며 십수년 세월 입산고행을 마다않고 터득하신 학문이 아니던가! 선생님은 10대부터 수행을 하시다가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하셨다.

 

전남 남원인근 인월에 가면 한의원하는 노개식씨가 계시다. 그 분의 증언으로는 선생님이 20대 초반쯤 되셨을 때 입산수행을 하시다가 신이 들려서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역경을 겪으신 일이 있었다고 한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이 되었고 노약국에 와서는 방바닥을 헤매며 기어 다니기도 했으며 제 정신이 아니었는지라 보는 사람들마다 완전히 미친 사람취급을 하기도 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여기서 이해를 돕고자 하면 수련할 때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밤을 새우며 용맹정진 하다가 氣를 감당치 못하면 충분히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인가 눈에는 빛이 났고 얼굴은 환골탈태하여 광명이 비치는 모습으로 찾아오셨다는 말을 들었다. 노약국이 알고 있던 모습과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진위에 대한 신빙성이 약하므로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만 소개하려 한다.

 

선생님의 증언으로는 10대부터 조부무릎에 앉아 한학을 공부했고, 상학을 배우셨으며 군에 입대하여 관상을 봐주셨는데 지나고 보니 과연 그렇게 맞을 수가 없었다는 증언을 선생님의 친지를 통해 들었던 일이 있다. 선생님은 10대부터 풍수를 배우고자 어느 지관을 찾아갔는데 이론이 없었는지라 배울게 없었으므로 포기하고 남원 근처 지리산 자락 운봉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있던 朴四柱라는 분을 찾아가 사주학을 공부했는데 역시 명쾌한 통변은 없었으나 각 지방에서 우편으로 사주의뢰가 들어오곤 했다고 하셨다.

 

하루는 제주도에서 평생사주를 봐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는데 박사주는 제주도에 사는 사람이 사주를 의뢰할 정도라면 어부는 아닐것이라는 심증은 있으나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아무리 의뢰인의 명조를 보아도 선주인지 어부인지 알 길이 없어서 편지봉투에 생선냄새라도 나지 않나 해서 맡아보기도 했다는 말씀을 들었다. 혹시 고기잡는 어부는 아닌가 해서였다.

 

선생님 성격으로는 흐지부지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확실한 斷(끊고 맺음이 분명)을 좋아하는 성품이었다. 차라리 사기를 쳤으면 쳤지 미적지근한 술객이 되기를 거부하셨던 것이다. 제산선생님을 일시라도 수행해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느껴본 심경일 것이다. 고로 선생님은 결심하기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술객을 포기할 지언정 한 소식을 하지 않고서는 이런 식으로 사주를 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다. (이 말은 서울에서 처음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박사주 한테도 배울게 없다고 판단하시고는 청허당을 만나게 디ㅣ었다고 했다. 청허조사는 丙申生(1896년생)이시다. 청허단은 도인으로서 한약처방도 하셨으므로 의원으로 통했던 분인데 청허당이 56세 되시던 해부터 도문에 입문하여 66세때 득도하셨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노약국이 증언하는 시기로 보면 청허당을 만났을 때가 수도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선생님이 깨달음을 얻으셨을 무렵에는 청허조사께서 이미 득도하신 다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추운 겨울에 물이 얼어서 法水(정안수)를 떠올 수가 없었는데 청허조사께서 얼음앞에서 무슨 주문을 외우니까 法水한 그릇정도가 조로록 흘러내리더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신기가 있었다는 말을 사모님께 들었다. 그래서 어려서는 신동이라고 동네에 소문이 났었다고 증언했다. 이 말은 사모님께 들었고 선생님께도 들었던 이야기다. 본시 허약한 체질로 태어나서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입산하여 고행을 하면서 더욱 몸이 쇠약해졌으므로 체력을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들었는데 노의원의 증언을 들어보면 신기가 발동하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니 이런 일들이 건강과 연관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짐작이다.

 

약체가 밤샘으로 용맹정진하게 되면 능히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헛것이 보이고 미치는 경우도 허다한 사실이다. 지금 부산에 계시는 전서경스님은 용맹정진하다가 헛것이 보여 자기 발등을 도끼로 찍는 일이 있었다. 자기 발등에 무섭게 느껴지는 구렁이가 칭칭 감고 있어 도끼로 뱀을 찍은 것이 발등을 찍어 중상을 입었던 일화도 있다. 또는 어떤이는 자기 생식기를 돌로 짓이기는 일도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산신기도나 입산수행시 지도해주는 스승이 없으면 위험한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나는 상당기간 입산수행을 했지만 원채 독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제대로 용맹정진을 안해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런 이상현상을 경험해 보지 못했고 다만 천공은 받아본 경험이 있었다.

 

선생님은 청허당을 만나 일정기간 수학을 하면서 작두로 약초를 자르고 약국에 일을 거들었다는 증언을 측근으로부터 들었고 청허당을 수행하시면서 한약을 수십가마니는 작수셨다는 말도 가까운 측근이 전해주어 알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짐작컨대 선생님은 6.25사변때 다리에 총상을 입고 다리밑에 쓰러져 죽다 살아났다고 하셨다. 그런 일로 인해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는지라 아마도 청허조사의 약국에서 일을 거들어 드리면서 허약했던 체질을 보살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어느날 신기가 발동하여 한때 방황하면서 노약국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짐작이므로 신빙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수행중 청허당께서 구령삼정주와 청심경을 주시면서 백일참선에 들기를 권했는데 주문을 받들고 지리산 벽소령으로 가서 백일기도를 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도전하기를 여러차례 반복했다고 선생님께 들었다. 백일참선에 정성을 다하려고 하면 거의 끝나갈 무렵이면 꼭 마장이 생겨서 끝을 맺지 못했다고 하셨다.

 

한번은 함양백운산 통신암에서 백일참선삼매에 드셨는데 90여일이 지나서 봉사성지(온 세상이 웽웽하는 벌 소리처럼 들리는 현상)단계에 이를 무렵 갑자기 어머니가 아버지 산소에 가시다가 도랑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는 현상이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반을 보고는 집에 가서 어머님한테 며칠간만 아버지 산소에 가시지 말라고 전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왜 산소에 가지 말라는지 궁금해서 산소를 가시다가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다는 소식이 왔다는 것이니 백일을 며칠 남기지 않고 봉아성지의 단계까지 가서는 어머니의 절족사고로 하산하여 성공하지 못했었다는 말씀도 들었다.

 

한번 하산하면 연속정진이 어려울 뿐 아니라 다시 도전하기까지는 한동안 체력보강을 비롯해 준비기간이 필요하므로 1년에 한번 시도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또한 백일중에 하루만 빠져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정진이다. 이렇듯 백일정진이 그리 쉬운일은 아닌 것이다. 결국 백운산 통신암에서 득도하실 때까지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으셨고 방황도 많이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왜냐면 득도하신 다음부터는 수행에 관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인데 수행하실 때의 일화가 많은 것으로 보아서는 여러번의 실패가 있었다는 증거며 벽소령에서의 일화가 더 많다는 것은 득도전의 고행과정이었던 것이기에 미루어 짐작이 가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지리산 벽소령에 계실 때의 일화가 여럿이 있다.

 

산중공부할 때는 가장 힘든 것이 의식주해결이다. 아무리 도인이라 할지라도 먹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려운 법, 그래서 수도자들은 가장 적게먹고 살아갈 수 있는 수단으로 생식을 하기도 했으며 경비와 시간낭비를 줄이려고 화식조차 하지 못하고 가루와 물 한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므로 건강을 망치기도 했던 것이다.

 

제산선생님도 약 6개월간 솔잎가루만으로 생식을 하셨다는 말을 선생님 장모로부터 들었다. 이때가 乙巳年(1965)여름이다. 그 당시 벽소령에는 6명의 도반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에 선생님이 가장 총기가 뛰어났다고 했다. 도반들과 월동할 양식을 마련하고자 만행을 해야 했는데 적임자가 없으므로 선생님이 장날을 택하여 인월장터로 나갔다는 것이다.

 

사실은 선생님도 만행을 나와서는 사주를 보던지 아니면 이름풀이를 해주던지 돗자리를 깔아야 할 판이었는데 형님벌되시는 분이 선점하고 있어 그 옆에다 자리를 펼 수는 없고 하여 형님과 동업?을 한판 벌려볼 심산으로...

 

“형님 뭐 하십니껴?” 하고 물으니

“이보게 동생 내가 성명학을 공부했는데 이 성명책이 참으로 신기하게 잘 맞는데이...자네도 한번 시험해 볼랑가” 하며 자신만만해 하더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반가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면박할 수도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하면서

 

“형님이요 내가 대신 봐줄테니 지켜보이소” 하고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한나절이 되어도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마침 눈이 내리고 바람마저 불어서 으스스한데 추위를 이기려고 옷깃을 저미고 시린손을 비벼가며 주린배를 웅크리고 있는데 파장이 되어 자리를 거두려고 하는데 영감 한분이 다가와서는

 

“이보게 젊은이가 이름풀이를 할 줄 아는가?”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예, 염려마시고 이름만 대 보이소” 하고 큰소리로 외치니 영감이 “으흠~”하고 기침한번 하고는

“받아적어보게” 하면서

“높을 최, 남녁남, 심을식이네 어디 한번 풀어보게” 하더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이름풀이를 하는데

 

“흐흠”하고는

“노인장께서는 높은 언덕 남쪽에 심었으니 과수원을 하십니더” 하자 최노인은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참말로 그것이 이름에 있단 말이가?” 하기에 말을 이어

“예, 그렇습니다.”

“높을최는 언덕이오, 남녁남은 남쪽인데 높은 언덕 남녁에 심었다면 과수가 아닙니껴: 하며 말을 이어

“그런데 노인장 손자가 하나 있는데 다리를 접니더”하고 말하자 최노인은 반경반희하며 희색이 만면하더니

 

“자네 참말로 손자다리가 아픈게 내 이름에 있능가? 그게 사실인가? 하며 재차 확인을 하기에

 

“그렇심더 나무를 겨울철에 심었으니 가지가 얼어있는 격입니더” 하자

“우째 겨울나문가?”하고 묻는데 선생님이 격물치지의 이치를 설명해 주었다.

 

이 추운 겨울에 하필이면 남식이를 물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겨울과수나무가 되었다고 통벼했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 격물치지라 하는데 이는 아무가 쓸 수 없는 통변이다. 신명이 있거나 혜안이 열리지 않으면 삼천포로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노인은 선생님을 신기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는 말이...

 

“눈도 오고 하니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자네 나 따라 갈 수 있건나?” 하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눈치빠르고 자존심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하실 선생님이 아니던가.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칠리 없었을 것이다. 춥기도 하고 배고 고프고 형님에게 체면도 살려야 하니 이참 저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쾌히 응락하니. 최노인이 앞장서서 가자는 곳으로 따라갔는데. 남원을 지나 전라북도 임실로 가더라는 것이었다.

 

인월장터에서 임실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다. 짐작컨대 임실까지 가려면 버스를 탔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버스타고 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나 먼 거리였기에 추측해본 것이다.

 

임실 최노인댁에 도착하니 사랑채도 큼직하고 대궐같은 집에 사는 부호였다는 것이다. 동네사람들이 굽실거리는 것으로 보아 대지주임에 틀림없어 보였다고 하셨다. 도착하자 안채에 연락해 밥상을 차려오고 대접이 융숭했다. 그날은 사랑방에서 형님과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최노인이 동네 어른들을 소집하여 이름풀이에 대한 소개를 하니 너도 나도 이름풀이를 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최노인 사랑채에서 보름간이나 감명을 했다고 하니 시골동네에서 보름씩이나 상담을 했다면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이웃동네 사람들까지 소문을 내서 불러 뫃은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보름동안 번 돈을 간추려서 토굴에서 월동할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가 당시에 논 닷마지기값이 족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약간의 과장법도 쓰시므로 전액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도이 들어왔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이 없다.

 

논 한마지기 값이 얼마였는지 몰라도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큰돈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인데 시골살림이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본 것이다.

 

나는 무엇이든 의심부터 하는 습성이 있다. 의문과 비판 이런 성격 때문에 명리학을 공부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 점도 부인할 수 없고 이러한 의심과 비판이 자연이기학을 연구하는데 매우 유익했다는 생각이다.

 

그때가 선생님 나이 30세 되시던 겨울이다. 논 다섯마지기 살만한 큰 돈을 형님에게 드렸다고 하셨다. 집안 형님벌 되시는 분으로 6.25사변때 다리밑에서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을 때 그 형님이 구해주셨다고 했다. 그래서 언제라도 그 은혜를 갚고자 했는데 기회가 없더니 이번 기회에 보은을 했던 것이다.

 

형님과 헤어져 벽소령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설이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으나 기분좋은 만행이었으므로 콧노래를 부르며 토굴로 돌아왔는데 이틀인가 지나서 형님이 헐레벌떡 토굴로 들어오며 큰 소리로 하는 말이

 

“광태 있능가?” 하더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본명이 광태였던 것이다. 훗날 제현으로 개명하셨는지 확인은 없지만 호적에는 광태로 되어있던 것을 갑자년 선생님을 처음만난 해 겨울에 본적지에서 지적등본을 발급받을 일이 있어서 확인했던 것이다.

 

선생님이 놀라서 나가보니

“이 사람아! 자네가 증말 도통했으면 내가 집에 가다가 돈을 몽땅 잃어버릴 것도 알았어야지? 남의 운명은 안담서 내 돈 일어버릴 것은 우째 몰랐노” 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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