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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修行의 길] 霽山門中 入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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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야 작성일12-02-09 16:48 조회1,3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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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修行의 길]門中修學하다.

 

술객 백씨가 떠나고 일상업무는 계속됐다. 문객은 날로 늘어나는 추세였으므로 하루에 약 50여명씩 몰려들었다. 몰려오는 고객을 소화할 수 없어 대략 하루에 35명가량만 상담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접수실에서 서기가 더 필요했다. 단 둘이서 접수하랴 감명하랴 대필하랴 도저히 일을 치러낼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점심식사는 거의 거르는 편이었고 선생님도 소식하시므로 나와 같은 식성이어서 하루 두끼로 끼니를 때우기 일수였고 상담시간도 더 늦은시간까지 늘리게 되어 어느날은 밤 9시까지도 강행을 하기도 했다.

 

접수와 대필, 매일같이 반복되는 바쁜 일과속에서 손과 몸이 쉴 사이없이 분망했고 아침 일찍부터 접수를 하면서 틈나는대로 대필하며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했기에 망정이지 글쓰기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면 천만금을 준다해도 며칠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고야 말았을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일에 혼신을 다 바쳐 노력했고 혹시라도 선생님께서 불편하지나 않을까 보필하기에 온 신경을 썼지만 이보다도 선생님께 더욱 고맙게 느꼈던 점은 온종일 손님을 치루고 나면 피곤해서라도 저녁시간에는 쉬어야 할 것이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날 그날의 특이했던 명조를 설명하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으니 진정한 사제간의 정이 무엇인가를 느끼며 신뢰가 쌓이게 되었던 것이다. (특별한 경우란 선생님과 친분있는 분들이 방문하여 외출하실 때다. 외출하실 때는 항상 나를 대동하셨다.)

 

하루 업무가 끝나면 저녁에는 그날 감명했던 고객의 명조를 검증하고 연구하는 일과가 계속되었으니 피로에 지칠만도 했지만 수학의 목적으로 부산에 내려왔으며 선생님의 애정어린 지도편달에 힘입어 새로운 이론과 통변의 연구로 세월이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선생님이 부산에 계신다는 소문이 나자 저녁시간만 되면 부산에 거주하는 술객들도 하나 둘씩 찾아오곤 했으며 낮에도 선생님의 통변하는 것을 어깨너머 배워보려고 자기들 업무는 전폐하고 드나들었다.

 

樂山禹先生도 이때 자주 드나들었는데 1965년도부터 선생님과 알게 되어 대필서기도 하면서 자연이기학을 공부하셨고 당시엔 광복동에서 철학관을 운영하고 계시면서 선생님이 필요로 하실 때마다 대필을 해주고 했다고 소개받았다.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낙산선생은 아무리 가르쳐도 탐욕에 눈이 가리아 혜를 열지 못한다고 낙산선생을 앞에 앉혀놓고도 핀찬을 주시곤 하지만 속이 좋은건지 너그러운건지 낙산선생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자주 만날때마다 우스개 소리로 무안을 주며 이야기 소재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낙산선생은 제산선생님을 존경하며 좋아했다. 사제지간이라기 보다는 12년이나 연상의 도반드로서 그만큼 친분이 두터웠다는 것이다. 낙산선생의 증언으로 보더라도 아무리 자연이기학을 터득해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아직까지 끝과 시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선생은 총기가 있어 보이니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제산선생이 그렇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면 희망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은 맨날 제산선생님께 멍청하고 미련하다는 꾸중만 들었고 칭찬은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고 웃으면서 농담삼아 실토했다. 그러면서 본래 제산선생은 칭찬에 인색해서 그렇다면서 한 두 번은 칭찬해도 될만한 것도 있었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樂山이나 仁山선생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낙산선생은 천고비전 일본판 원서 28권을 공부했다고 했다. 일본 유학시절에 구입한 책으로 독학하여 철학관을 운영하면서 제산선생님을 만나 이기학의 이치를 터득해보려고 무단히 애를 썼지만 자기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나와 몇 년간 친분을 유지하며 만났고 요즘에도 가끔 연락은 오는데 제산선생님이 작고하셨을 때는 장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연로하므로 선생님의 타계를 보려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존시에 섭섭했던 점도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면 낙산선생은 자기에게 좀 더 가르쳐 주었으면 깨달을 수 있는데 제산선생이 핵심은 주지 않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혀 제산선생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었다고 선생님을 대신하여 뜻을 전하고 싶다.

(2010년에 연로하신 분이 김천농장까지 親訪해 주신 분이다.)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해 본 사람으로서 나에게 지도해 주실때도 그와 같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회도로를 좋아하시는 강의 스타일이 있다. 지금도 구 미대사관 옆에서 철학관을 운영하고 계신다고 한다. 대부분 낙산선생께서 학문토론에 관한 문제나 여러 가지 사연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연락이 오는 편이고 내가는 한번도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戊乙癸癸 낙산선생의 명조

寅巳亥亥

 

丙丁戊己庚辛壬

辰巳午未申酉戌 3運

 

저녁식사를 마치고 낙산선생의 명조를 내 놓으시며 나더러 통변해 보라는 것이었다. 며칠간 선생님의 통변을 지켜보고 이론을 배우긴 했지만 아직 자연이기에 물리를 얻지 못했으므로 과거에 공부했던 실력으로 몇 마디 할 수 있었다. 질문의 요지는 운로중에 어느 대운이 좋았겠느냐? 는 것이었다.

 

보편적으로 水多하고 신강하며 冷寒하므로 조후따라 火運이 좋았다고 하면 아마도 나에게 시험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감에 그 반대의 답안을 제출했던 것인데 낙산선생이 먼저 깜짝 놀라며 아직까지 자기 명조를 보고 이와 같이 통변하는 술객은 보지를 못했는데 차선생은 참으로 총명이 뛰어났다고 하며 제산선생의 후계자로 손색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실은 눈치로 때려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註解:조후=사주가 냉한 다습 한 경우 따스한 火를 필요로 할 때와 고온조열하면 水의 生를 필요로 할 때 사용하는 術語.

 

선생님께서 다시 명조하나를 제시하시며 통변해 보라고 하셨는데,

 

癸癸甲壬

亥卯辰申

 

이 명조는 강씨가문에 태어났고 진주가 고향인데 무슨 직업을 가졌으며 재물복은 어떻게 통변해야 되느냐고 하셨다. 낙산선생은 이 명조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웃으면서 “참으로 어렵지” “명리가 그렇게 쉽다면 못해먹을 사람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재물이 보이지 않고 암장도 없으니 재물의 源神인 식상으로 봐야겠는데 그렇다고 비겁이 만정하니 재복을 타고났다고 할 수 없었고 직업이야 더 말할 나위없이 캄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참을 봐도 해답이 없었고 입도 떼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격국론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다. 財星이나 官星, 印星이 모두 길신인데 吉神이 없어도 그릇이 큰 사람이 있는 것이니 이는 격국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格局과 用神이 곧 직업이며 재물이며 가족의 덕이라고 일러주시고 낙산선생과 한바탕 호탕하게 껄껄 웃으셨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

 

어찌 사주팔자만 보고 그 사람의 그릇을 알 것이며 재물복과 가정사는 물론 건강을 알 것인가? 하고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됐는데 낙산선생의 명조부터 설명해 주셨다.

 

戊乙癸癸

寅巳亥亥

 

丙丁戊己庚辛壬

辰巳午未申酉戌

 

假正印格으로 보셨다. 正印亥月출생이나 戊土당령이니 眞格이 못되었고 假格이 되었다는 것이다. 正印格을 순수한 선비요 학자다. 선비는 官이 명분이므로 用하고자 하는 것이 본능이다. 乙木은 동결되어 巳火를 喜한다. 정인격이 초년에 辛酉, 庚申 官運을 만나 선비가 立冠하였으니 외국유학이다. 亥亥는 敬神星으로 종교인지라 戌(선방서적) 酉(사찰) 申(寺鍾)운으로 왔으니 14세 辛運이 당도하자 통도사 스님이 되어 사찰재산으로 일본불교전문유학을 했다.

 

巳火역마는 일본으로 가는 선박이다. (巳화는 물상으로 태양빛이니 일본이 된다.)

사화희신으로 합하여 酉生처를 만나서 불화한다. 酉는 乙木君主의 절지다. 을목화초엔 酉金이 가을서리가 되는 고로...戊土가 正財(本妻星)인데 얼어있고 乙木에 浴財(구역질...)라 寅木이 공망되어 時上戊土는 浮財며 巳中戊土는 路財다. 己未, 戊午, 丁巳운애 食傷調候를 만나 발전하는 대운인데 乙木이 浮木이 되어 신약하고 癸亥水가 寒濕하여 화토운을 받아드리는 기가 약하다.

 

해수정인은 기미무운에 정인을 탁하게 하여 외면은 선비체면이요, 내로는 탐욕이라 印과 財가 相戰하여 財貪은 하나 망신불성이라 多計동요만 하여 허송세월한다. 乙木이 無根하고 浮木이 되어 地를 못보고 天만 바라보니 친구가 없고 자존만 天上에 있다. 이상과 같이 통변의 묘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낙산선생은 허허 웃으면서 자기 사주를 이렇게 명쾌한 통변으로읽어내는 분은 세상에 오직 제산선생밖에 없다고 추켜세운 뒤 어디 가서 목이나 축이자고 하는 것이었다.

 

낙산선생은 술을 들지 못하지만 목을 축이자고 한 것은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차한잔 마시며 목이나 축이고 笑談하자는 뜻이었다. 이런 일은 자주 있었고 제산선생님이 와병중에도 만나면 그러했던 분이다. 주로 제산선생님이 술을 즐겨 드셨다.

 

더 이상 강의를 들을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함께 밤거리를 누비며 낭만의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낙산선생의 염불창가를 듣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목청도 좋았고 염불소리가 아리따운 기생도 반해버릴 만큼 낭낭했다고 기억된다.

 

광복동 뒷골목 어느 카페에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새벽녘에 여관방으로 돌아와서 피로를 잊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게 되었던 추억도 있다.

 

癸癸甲壬

亥卯辰申 晋州 姜氏

 

진주 강씨의 명조는 다음날 저녁에 이해하게 되었는데 土格이니 토가 재산이요, 辰土는 정관인데 甲木忌神이 蓋頭하여 신강하지만 부득이 申金용신인데 화가 없으나 辰月으 五陽이 進氣하니 印을 用하는 명조에 화를 지극히 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癸水는 卯木에 長生하는데 印星과 遠合을 하니 힘이 천하장사인지라 진주 씨름판에 황제라는 것이었다.

 

註解:

蓋頭=머리위를 덮고 있음.

五陽進氣=음력 11월부터 해가 길어지니 一陽이 시생하여 음력 四月까지 진기하므로 三月은 五陽이 되는 이치.

長生=힘있게 생기를 얻고 있다는 뜻.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어려웠으나 한번에 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되지도 않을 거시라는 생각을 하며 영원한 숙제로 간직하고 스스로 터득하기로 했다. 씨름왕 이만기씨도 癸卯生으로 卯月에 長生하였다는 사실을 훗날 검증하게 되었다. 계수는 印星보다는 長生의 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검증된 것이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이 계속됐다. 이러한 날이 1년만 지속되었다고 했다면 건강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었겠지만 학문으로는 입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회고해 본다. 그만큼 나날이 새로운 이론에 심취하며 일취월장했다고 생각된다.

 

내려온지 1주일정도 지났을 무렵 서울에 남아있던 同生이 봉고차를 매각처분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큰 아들 학비로 주고 내려오라고 하여 8월 20일경 내려왔으므로 교대로 대필하였으니 선생님이 훨씬 수월해 하셨다.

 

접수는 거의 내가 담담했으며 틈나는데로 대필도 거들곤 했다. 동생도 글솜씨는 있는지라 대필에 어려움은 없었으나 접수는 내가 아니면 어려웠던 것이다. 동생은 명리의 기초가 없기 때문에 간지도 이해치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러기를 한 20여일쯤 지났을 무렵에는 접수하면서 예비상담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어떤 문객은 접수하는 제자가 더 잘 보더라 하는 소문까지 나돌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소문 때문에 그해 겨울 제산문중을 잠시 떠나있어야 하는 비운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었으니 선방에서 항상 이르는 호사다마요, 득도하고자 함에 태산같은 마장의 벽을 몇겁 넘어야 한다는 진리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서울에 있을 때는 상학을 주로 활용했지만 선생님께 수업받으면서는 제산문중비전에 文理를 터득해야 했으므로 상학은 무조건 눈을 감았던 것이다. 제자가 더 잘 본다고하는 말은 선생님이 간혹 지적하지 못한 어떤 문제점을 내가 지적해 줬으므로 기인했던 것이다. 문중수학을 전념할 때는 완전히 무심 그 자체였다.

 

과거를 잊었고 현재도 망각했다. 無에서 시작하는 것이었으므로 아무런 부담도 없었고 내가 사무실을 내고 고객을 상담할 때와는 마음자세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돈 받고 고객상담할 때는 틀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부담으로 작용했지만 세상에 가장 위대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는후학의 입장에서 말했다가 틀리면 본전이고 혹시라도 고객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거나 황소 뒷걸음치다가 신기한 문제를 하나만 적중해도 과연 큰 스승의 제자라고 신통하다는 소문이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니 이 같이 부담없고 편할 수가 없었으며 접수하면서 밤에 공부했던 이기학을 검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니 삼매지경에 몰입하기 일수였던 것이다.

 

이 시간들이 없었던든 오늘날 내가 부산에 정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회고한다. 왜냐면처음으로 부산에 내려와서 이때만큼 신명이 밝고 혜가 맑았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일이 계속됐고 선생님의 자존심이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예비상담을 했는데 하루에도 30명에서 50명까지 몰려드는 고객을 상담하자면 피로가 겹치고 지칠 수도 있지만 이럴때마다 선생님은 침체된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대중을 웃기는 격담을 잘 하셨다. 관중을 매료시키는 격언이나 방언으로 순서를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지루하지 않을 만치 농담도 잘 하셨고 간혹 손님들이 시끄럽게 떠들면 호통을 쳐서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질서 유지도 아주 특별히 잘 하셨던 것이다.

 

나도 말솜씨라면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문객들에게 지루하지 않게 우스개 소리도 많이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웃기고 울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화기애애한 나날들을 보람있게 지냈다고 생각된다. 내가 문객의 명조를 접수하면서 국소를 찌르듯 한소리씩 했던 내용은 생략하겠다.

 

동생이 와서도 밤 공부는 계속되었다. 동생이 일을 도우므로 낮에 선생님의 피로도가 덜 했던 것 같았다. 저녁이면 선생님도 생기가 솟았고 가르치는 것이 퍽 재미있어 하시는 것 같았다. 특별한 방문객만 없으면 이기학에 대한 이론과 검증하는 시간을 자정까지 거르는 날이 없이 거의 매일 했던 것이다.

 

수 없는 날들을 지켜봤지만 선생님은 그날 감명했던 사람들의 명조를 순서대로 기억해 내시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컴퓨터 메모리와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더러 잊어버리는 명조가 있어도 선생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아직 명리에 물리가 열리지 않았으므로 기억장치가 자리를 잡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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