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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修行의 길]海東公子 霽山先生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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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2-02-01 16:49 조회1,6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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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修行의 길]海東公子 霽山先生을 만나다.

 

떠돌이 술객 백모씨

 

그당시 30여년간 술객생활을 했다는 분으로 평생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거리 저마을로 떠돌아다니며 行術을 하던 분이 있었다. 그것도 八字소관이겠지만 선비로 살고자 했다면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하지 않았겠는지, 그저 神殺 몇 줄 배워서 밥먹고 살려다 보니 혹세무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門客마다 부적과 살풀이 굿이나 하라고 했으니 두 번다시 찾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했다. 하지만 처자식을 굶길 수 없고 학술로 밥벌이가 어렵다 보니 이것도 팔자탓이었으리라.

 

庚壬庚辛

子寅子未

 

위 명조의 통변을 보게 되었는데 가편인격이니 계모슬하에서 기한에 허덕이는데 官星이 용신이나 보이는게 없고 寅木식신속에 官星이 숨어있으니 입으로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寅木은 망신살에 해당하며 전쟁터도 되므로 입만 열면 망발인데, 시대적 배경이 지금과 같았다면 아마도 사기꾼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운게 없고 고작 술객으로서 開口亡身하다보니 일상이 전쟁과 같았던 것이라는 통변이었다.

 

팔자에 녹슬고 이빠진 칼자루(羊刃)가 두 개나 있고, 영웅심만 강하여 장군흉내(신들린 무당)를 스스럼없이 내면서 부적협박을 하며 부적을 쓰지 않으면 자식이 어떻게 된다느니, 남편이 잘못될 것이라느니, 사업이 거덜난다는 엄포를 주어 門客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라 하겠다.

 

찬서리 설한풍에 꽁꽁 언 밥으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구나. 않을 자리를 찾으나 방석(토가 없어서...)이 없으니 문전걸식이라 혹세무민이 아니면 의식이 간데없다. 라는 식으로 통변을 하시는게 아닌가.

 

백모씨가 제산선생님보다 나이는 더 먹었지만 명쾌한 통변에 자신도 할 말을 잊고 명하니 반론이 없었다. 선생님께서 나중에는 미안하셨는지 ‘라면이라도 먹도록 비전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내가 선생님 따라 부산으로 내려올 때 따라나섰지만 공부할 분이 아니었다.

 

쉽게 써먹을 수 있는 비법이나 몇 마디 얻어보려고 하다가는 돌아가고 말았다. 평생을 공부해도 하자기 어려운 심오한 학문을 그리도 쉽게 생각하는 정신으로 어찌 술업으로 성공을 기대하겠는가. 수십차례 제산정사에 드나들며 비법좀 배워보려고 애를 쓰다가 심오한 통변에 입문치 못하고 떠나고 말았다. 언젠가는 충무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병인년에 헤어지고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떠날 때 나에게 빚을 지고 갔기 때문에 갚을 길이 없어 찾아오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부인은 인중무토가 용신인지라 삼합이 되는 병술생을 만났는데 식신속에 있으므로 식당일을 하며 가사를 돕고 있었다.

 

같은 팔자라 할지라도 출신가문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며 태어난 고향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어떤 직업을 선택하느냐? 에 따라서도 인생이 변한다는 가르침에 막혔던 가슴속이 후련하게 뚫리는 듯 했던게 사실이다. 우리나라 인구비례로 보면 같은날 같은 시간에 태어나는 사람이 남녀간에 200명이나 되는데 모두 한결같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부모슬하에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도 운명을 다르게 봐야 하는 제산학의 진수에 자연히 머리가 숙여졌던 것이다.

 

당시 역술인협회 이사로 있던 김모여사의 경우

본명은 신씨가문출신이나 가명으로 철학과을 운영하면서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의 여유로운 가정의 주부지만 취미로 명리학을 공부하여 현재까지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는 분이다. 모 방송국 탤런트2기생으로 미인형이다.

 

내가 입산수행중에 알게 된 분으로 내외가 함께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운 분이기도 하다. 남편은 당시에 김포세관에 근무했으며 탤런트 시절부터 지인이 많았던 관계로 발이 넓었고, 출판사업과 방송업에도 정열을 쏟으며 가수들 매니저 역할도 할 만큼 남성 이상으로 활동력이 강한 분이다. 내가 제산선생님을 만나 공부한다는 소식을 박장열군으로부터 전해들은 술객들은 너나없이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명리에 야심과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이름만 대면 서울 장안에서 알만한 분들도 여러명이 있다. 신여사도 약방의 감초인지라 소식을 듣자마자 단숨에 나를 찾아 달려오게 된 것이다.

 

戊庚丁壬

寅午未辰

 

내가 제산선생님을 만난지 3일째 되는 것으로 기억된다. 신여사가 공부방으로 찾아와서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제산학을 검증이라도 해보자는 심산이었는지 비싼 상담료를 내 놓으며 자기의 단골고객 몇분의 사주를 보면서 통변의 묘미를 지켜보고는 자기 명조를 내 놓았는데,

 

잡기정인격에 정관명분을 수상으로 삼았으나 망신스런 조후희신과 합이 되어 명분을 버리고 술업으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남편은 바다로 합을 하여 칼을 찼으니 바다를 지키는 직업이다 라고 자유자재로운 통변을 하는 것이었다. 실로 그의 남편은 김포세관에 근무하고 있었으니 바다 官으로 권총차고 밀수품 단속을 했으니 어찌 신묘하다 아니하리오, 그리고 너는 전생에 한의원이었다며 전생론까지 통변해 내는 것이었다. 신여사가 여기서 입을 다물고는 쇼킹한 감동에 빠지는 듯 했다. 그리고는 어려서부터 공부만 됐으면 한의사가 꿈이었다며 소녀시절을 털어놓는 것이다.

 

이어 관인이 질서를 수행해야 하나 조후희신(자신의 기분)이 명분이 되는 관성의 머리채를 휘어감고 있으니 남의 간섭과 잔소리가 싫었는지라 천만금이 생긴다 해도 속박이 싫어서 프리랜서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라 개구망신이니 九流業이다. 했던 것이다.

註:구류업이란 아홉가지 떠돌이 직업을 의미한다.

 

천간을 신살로 통변하고 육신과 오행의 해석이 자유자재했으니 이때 처음으로 듣고 보는 순간이었으므로 새로운 학문에 매료되어 내 혼백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허공에 붕~떠있는 기분이었다. 당시의 서울지역의 역학수준으로는 상식을 벗어난듯한 통변이었지만 적중률도 매우 높았던 것이니 팔자속에 있는 이치는 간지를 막론하고 하나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통변이 끝나자 신여사는 자신의 정보를 내가 알려드린 것이 아닌가 의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나도 모르는 자기 단골고객의 명조로 검증했던 관계로 더 이상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만큼 완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후로 신여사는 제산하에 반하게 되었고 남편과 자식을 서울에 두고 수학을 원하여 부산까지 내려와서 무단히 애를 썼는데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제산선생님은 여자후학만 생기면 가정에서 방해를 하는 일이 생겨 오늘날까지 여성후학을 양성하지 못했다. 과거 병진년(1976년)에 지리산 쌍계별장 특강때 현재 시카고에 사는 양여사가 한분 있었지만 60일 특강일정도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파산했던 일화도 있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난명학적 인연법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正印格과 正官格이나 正財格에는 겁재가 忌神(꺼려하는 五行)인지라 해로불가요, 불연이면 가환이라 했지만 신여사는 正印格으로 태어난 운명이 겁재양인의 인연을 만나서 살아왔던 것이니 이론상 이별을 예고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인데 당시에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분이었으나 제산학에서는 미래에 이별될 것을 예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난명학을 연구하면서 고심했던 부분이었는데 종내는 캐나다와 한국에서 별거하며 지내게 되었으니 인연법을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나 사회적으로 만나는 인연법과 해로의 인연법을 달리 통변해야 한다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므로 난명인과법이 새롭게 정립되었던 것이었다. 이후에도 신여사는 제산하을 배워보려는 노력을 끈기있게 노력했으나 나도 시간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모든 것은 인연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마음을 비우면 하늘이 돕지만 의욕만 넘치면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교훈을 깨닫게 된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면 사실상 신여사는 백모씨와 같이 학문보다는 술수로서 배우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인데 여성의 신분으로 늦은 나이에 학문을 체계있게 연구한다는 것이 무려였을 수도 있다고 해석된다. 신여사는 대야농장이 5년전 방송에 나갔을 때 어머님과 같이 다녀가기도 했으나 요즘엔 발거름이 뜸하다.

 

무당 강보살 통변내용

이 분은 서비스업(주점)을 하여 한때는 재물도 많이 벌었다고 하는데 어느때 가운이 기울기 시작하여 내림굿을 한 무당이다. 처음 나와 만났을 때 ‘당신은 태백산에서 산신령 내림굿으로 무당이 되었구나’ 하자 그 후로는 내 공부방 이웃으로 이사까지 와서는 매일 들리며 음식도 대접하며 나를 스승처럼 생각하고 따르던 부인이다.

 

제산선생님의 학문을 배우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 나름의 정신적 스승인 내가 더 공부한다는데 환영해주던 분이다. 제산선생님께 사주를 보게 되었는데 인생상담을 하는 사람으로서 신묘한 통변에 아니 놀랬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丙己庚壬

寅酉戌申

 

정식으로 평생사주를 본 것은 아니다. 내 공부방에 자주 드나드는 분이었기에 통변의 이치를 보여준 것이었다. 지금도 그 기록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대로 소개하자면, 本命은 土日로서 年上에 財星이 있고 戌月이며 신유술로 합한 하고, 북쪽 고향이다. 여기서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북쪽 고향이라고 한 대목이다. 이와 같은 팔자가 남녀구분해도 약 100명가까이 존재하는데 어째서 북쪽출신이라고 했는가? 이는 명리 이전에 어떤 신명의 경계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다. 아니면 언어속에 은연중 이북말씨가 배어나와서 눈치로 알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무시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토정 이지함선생의 월령도라는 점서에는 그 사람의 생년월일시만 대면 성씨가 무엇이며 배우자는 무슨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리라는 신통력이 있다. 아직 월령도를 해석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이므로 혹시라도 제산학에 출신고향을 아는 비결?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하고 입문수학할 때 여러각도로 찾아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調候 用인 듯 하지만 격용으로 看(판단)함이 可요, 배필은 壬과 합하는 丁과, 申으로 합하는 卯가 되니 丁卯生이다. 연이나 관성기신에 해당하니 풍파가 많고 정유생 딸과 경자생 아들 낳고 이별이라. 직업은 申이 寺鍾(사찰의 종)이며 酉는 木鐸佛器며 戌은 佛書라 영통보살이다. 그리고 재물운에 있어서는 팔자에 봄은 있어서 씨앗은 뿌리고 가꾸나 여름이 없고, 가을이 바로 있으니 기르지도 않고 추수하려 하는 격이다.(급히 서둔다는 뜻)

 

사주팔자속에 있는 십이간지를 막힘없이 자유자재로 시원스럽게 통변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간지와 오행에 통달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라는데 사족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통변이었지만 실로 남편은 정묘생으로 국군장교였으나 이별하였고, 정유생딸과 경자생 아들이 있다는데 감탄했던 것이다. 사전정보라도 있었는가 했지만 강보살이 더 놀래며 나더러 가르쳐 드렸느냐?고 반문하는데 나 역시 강보살의 가정사 내막은 전혀 묻지도 알려 하지도 않았기에 모르는 사살이었다.

 

다음은 술객 최모씨의 명조다.

이 분은 甲申생으로 이대입구에서 철학관을 운영하였는데 당시 41세였다. 내 공부방과 이웃에 있어 자주 만나기는 했지만 학문의 정신이 달랐고 주로 부적이나 액막이 수단을 좋아하였으므로 돈은 좀 벌었다고 소문이 났으나 내가 지향하는 학문의 길과는 거리가 있었다.

 

인물이 훤출해서 부인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염문도 심심찮게 나돌던 분이다. 그렇지만 나를 많이 좋아하며 사경한 불경을 소장하기를 원해 자주 만나 식사를 하곤 했던 사이다. 최씨는 나이에 비해 술객경력은 꽤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많은 술객들도 드나들었으므로 술객사회의 정보도 많이 떠돌곤 했다. 언젠가는 그의 사무실에 놀러갔다가 부산에서 철학관을 한다는 분을 만나게 됐는데 명리에 해박한 상식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 만큼이나 자기 자랑을 좋아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번 이론을 늘어놓으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말이 많았다는 기억이 난다.

 

대화중에 자기는 학생들 시험결과 학점이 얼마나 나오는가를 사주로서 알 수 있다고 했다. 당시의 생각으로는 과연 사주팔자로 학점까지 예측이 가능할까 하고 의아심도 갖은게 사실이다. 수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우 흥미있는 정보였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육감으로 뒷걸음치다가 쥐잡는 격이려니 하고 무시하고 말았던 것이다.

 

최씨의 명조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자주 만나면서 관상이론으로 당신은 45세에 감옥에 갈 일이 생기겠다고 했던 일이 있었다. 관상에서 45세에 해당되는 안면부위는 콧등이다. 콧등에 붉은 반점이 흑갈색을 띠고 어둡게 보이면 반드시 액운이 오는데 왜 감옥이라고 했느냐? 하면 관록궁과 콧등의 색채가 똑 같으면 관의 노여움을 산다고 판단하는 이치가 있다.

 

제산선생님을 만나서 최씨의 명조를 보이니 선생님께서도 44세, 45세에 감옥에 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팔자에 여자가 많아서 보살틈에 끼어 사는 기생충이라고 하여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기억이 난다.

 

사주와 관상이 일치하는 통변에 나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했다. 부산에 있을 때 훗날 소문을 들으니 정말로 45세에 구속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지인으로부터 전해듣게 되었다. 제산학과 관상학의 통변이 일치한다는 것은 진정한 운명학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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