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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修行의 길] 海東公子 제산선생을 만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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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2-01-30 16:50 조회1,7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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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수행의 길] 해동공자 제산선생을 만나다.

 

◆註: 박장열군이 제산선생님께 나를 소개할 때 선생님께서는 나의 월수입이 어느 정도나 되느냐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박군은 거의 매일같이 내 공부방에 들리곤 하였으며 박군의 생활이 그다지 여유롭지 못했으므로 내가 가끔씩 점심값과 용돈도 주었고 지하철 정기권도 사주곤 했던 터였으므로 사무실 운영에 대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월 수입이 150만원정도는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 제산선생님께서는 1970년 부산 대신동에서 고객상담을 시작한 후, 1976년부터는 부산상담실을 정리하고 中山이라는 후학에게 사무실을 넘겨주고 떠나계시면서 간간 부산에 내려와 한두달씩 고객상담을 하시며 쉬고 있던 중이었는데 1980년부터 광양제철 건설공사가 시작되면서 제산선생님께서는 예비역 金某장군과 모종의 인연으로 인하여 동주건설이라는 토목회사를 설립하고 박회장으로부터 수의계약으로 광양제철 토목공사를 수주하였다가 경험이 없는 관계로 전문토목기사들의 인사관리에 공기를 맞추지 못하여 실패하므로 당시 창업자금 십수억원에 해당하는 손실을 입고 파산하여 다시 상담실을 오픈하기로 했던 것이다.

 

다시 부산에 내려와 본격적으로 고객상담을 시작하려던 중이었으므로 대필서기를 물색하고 있던 중 나를 채용해보려는 의중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스승을 원하던 시기였고, 선생님은 서기를 필요로 하고 있던 중이었으니 서로가 필요에 의하여 찾던 사람들을 만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수입에 맞춰 보수를 지급하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내가 보내드린 반야심경을 보시고는 이만하면 대필서기로 채용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는 박군의 말을 들은바 있다. 여기서 중이 제머리 못깍는다는 야유를 받은것도 사실이지만 김장군과의 악연에 의해 만부득 회사를 설립하지 않을 수 없었단 秘話가 있는데 이는 고인의 명예와 인격을 고려하여 공개하지 않는다.

 

도대체 김장군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박정권때 잘 나가던 少將이었는데 전두환씨가 집권하자 옷을 벗게된 분인데, 이역시 현역때 제산선생님께서 80년도에 퇴역할 것을 예고했던 분으로 퇴역후에 토목공사를 하려고 5억여원을 투자하고 금융권을 이용하려 했으나 정권차원에서 대출을 막는 바람에 제산선생님께 통사정하기에 이르러 비로소 악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때 제산선생님도 5억여원을 공동출자하여 광양제철 토목공사를 수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편에 이어...

 

제산선생님이 내 사무실에 도착할 때 까지 손님들은 떠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선생님께 사정을 이야기 하니 당신이 감명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내심 반색하며 제산학의 진수를 경험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접수를 시작했는데 그날은 6명만 상담을 하시겠다고 하므로 상담받기를 원하는 6명의 카드를 작성했고 나머지는 다음날 시간이 되면 상담해드리겠다고 돌려보냈다.

 

나는 당시 한사람 상담료를 5천원 받을때였고 서울 장안에서도 대부분이 5천원이었으며 관록이 있는 분도 1만원 이상받는 술객은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제산선생님의 상담료는 한사람에 3만원이었으니 웬만한 손님은 부담스러워 했으나 내가 앞으로 스승으로 모실분이라고 하니 나와 비교하려 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어떤분은 제산선생님보다 나에게 상담하겠다고 고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제산선생님을 만난 이후로는 신촌에서 일체 고객상담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틀연속 11명의 감명을 하게 되었고 틈나는데로 여러 사람들을 감명해주게 되었는데 상담료가 비싸다고 불만하는 고객은 한분도 없었다.

 

이날부터 며칠간 제산선생님은 신촌사무실로 나오셔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며 감명도 하게 되었으므로 [여관집 부인 가출사건]의 주인공도 만나게 되어 제산학과 관상학의 비교평가를 하기에 적절했던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던 것이다. 선비가 상담료를 논하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지만 당시의 상황을 솔직히 기록하고자 하는 뜻이므로 독자의 양해를 바라는 바이다.

 

상담내용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物象통변을 접하고 깊이 깨닫는바가 있었으며 당시만 해도 나는 기억력에 있어서는 누구에게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고 一讀知十의 총기를 발휘하여 제산학 문중비전에 일취월장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연법, 직업인연, 물상통변, 격국용신의 활용법, 신살통변, 각종인연법, 운로통변 및 활용법 등 새로운 이론에 매료되었던 것이 사실이며 자연이치에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전개되는 새로운 이론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히 염원으로만 갈구하던 자연관이 나의 적성에 흡족했다는 솔직한 심경이다.

 

당시 대부분의 철학관에서는 돈 벌기 위한 수단으로 부적을 쓰기도 했고 살풀이 등으로 혹세무민이 난무했던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물론 지금도 그런 부류의 술객들이 수다하지만 당시 나는 관상학이 주류였으므로 관상학으로는 살풀이가 없으므로 부적 따위에는 관심도 수단도 없었다. 그러나 부적에 관한 심리적 연구는 계속했으며 신통력이 어느정도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남달리 컸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술객들이 부적을 쓴다는 것은 아니다.

 

이때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 통변 중에

 

1.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모자제조를 하여 수출하는 巨商 박모씨의 暗神충출 통변이었는데 寅月 壬申日만 기억된다. 인중병화가 용신인데 寅申충하므로 충출하여 그 작용력이 막강해져서 거상이 될 것이라는 감명이었고, 다시 외국에 재물이 있으니 수출업체다. 라는 내용이었다. 당시만 해도 暗神의 활용법에 대해 문외한이던 시절이었으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보이는 사주오행도 다 풀어내지 못해 없는 머리를 짜내야 했던 자평명리나 사주첩경의 수준으로는 감히 예측조차도 어려웠던 것이다.

 

단 일반적인 子平命理에서는 신강신약에 중화점을 基本으로 통변했고 神殺론에서는 신약한 명조를 충하면 액운으로서 흉사가 발생한다고만 배웠고 암신에서 직업과 발복이 온다는 이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때였으며 특히 신약하면 日支申金이 용신인데 상충하면 용신이 破한다라고 배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오행이 用神인지도 분간하는 술객이 드믄 실정이었으니 실로 한심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제산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모르기는 해도 사주학은 영원히 역사속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2. 방배동에 사는 申社長의 명조는

 

丙戊戊壬

辰辰申申

 

申氏로서 자평학 이론으로는 신왕식신생재로 보았으니 이런 경우는 無視해도 맞게 되어있다. 식신생재격으로 身旺하니 八字가 좋다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상학으로봐도 사장틀이 짜여진 인상이 남아답고 패기가 있었다. 제산선생님의 통변내용으로는 壬水財가 대문밖에 있으니 탈취를 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守財神인 官星을 직업으로 삼아야 달아나는 재물을 붙잡는다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木이 투출하거나 있어야 하는데 사주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진중을목이 있으므로 대용해야 한다며 물상통변을 인용하여 辰土는 세탁소가 되며 염색채가 되고 의류가공도 되는데 임수는 財星으로서 女子도 되니 여자의류제조를 한다는 것이었다. 공장이라고 본 것은 辰辰自刑에 丙火편인이 있기에 통변한 것이다.

(자형이란 가위질이며 편인은 생산제조가 되는 이치다.)

 

실로 여성의류패션을 하는 분이었기에 신기한 통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女工이 수백명이나 되었고 구로공단에서 제조공장을 경영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던 때였다. 그때가 甲子년이며 甲大運이라 갑은 건축자재가 되므로 이제부터 건축업에 착수하게 될 것이라 했는데 사실로 건축업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를 위해 가르치며 부연설명하기를 乙木은 화초인데 어려서 자랄때는 꽃을 피우게 되니 화초가 되지만 나무란 성장되면 재목으로 변하는 이치라 돈을 벌었으니 성장이 다 된 木인지라 건축재목으로 변해간다는 자연순리의 법칙을 설명했다.

 

의류패션업은 처에게 맡기고 자기는 건축업으로 전환하려는 계획을 적중시켰던 것이다. 다시 놀랜 것은 부부궁 통변이었는데, 자신의 의지로 배필을 구하는 경우라면 乙亥생이 배필이지만 옛날 시대상황으로 볼 때 부모의 뜻에 따라 혼인을 했으므로 두 살 年上의 庚午생이 배필인데 의류업을 하면서 乙亥생을 소실로 거느리게 된다고 통변했던 것이다.

 

왜 경오생이냐?

壬水와 午火가 暗合을 하는데 오화인성이 父母의 뜻인지라 그렇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사전정보가 전혀 없었으며 그날 처음 상면한 사이었기에 학문의 신뢰성이 두텁다 할 수 있다. 신사장도 참으로 신비하다는 눈빛이었으며 도사님을 만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그날 저녁식사를 융숭하게 대접받았던 것이다. 사실로 경오생이 본처였으며 의류공장은 을해생 소실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니 어찌 신기하지 않았겠는가? 본처가 이 사실에 일절 불평이 없었으며 가정은 행복하다는 증언을 들었다. 이는 신사장의 포용력과 가정처세가 완벽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제산학의 진수는 자연관을 기본으로 하는 매우 과학적인 현실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마나 타고난 팔자속에는 격국, 용신이 있는데, 격국을 국가관으로 통변했으며 용신은 통치자 또는 수상으로 통변했고, 日主는 군왕으로 봤으며, 대신과 부하 및 역적과 충신을 구별하여 통변했던 것이다. 적장도 있고 간신도 팔자속에 있으며 군왕의 주머니를 노리는 도둑놈까지 구분이 됐으니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 하여 흥미진진했던 것은 물상통변인데 제산문중비기가 시중에 유출되기 시작한 것이 다음해인 1985년부터였다고 기억된다. 내가 제산문중에 입문하여 공부할 때 서울장안에서 많은 술객들이 나를 주시하기에 이르렀고, 내가 공부하던 자료를 훔쳐가지고 달아난 양모씨가 자료한편에 3백만원씩 팔고 다녔다는 소문도 들은바 있으며 고 박군도 이에 동조하므로 풀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출간도 해서 유포시킨 일이 있었으니 제산학의 위상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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