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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수행의 길] 해동공자 제산선생을 만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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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2-01-26 16:50 조회1,6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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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공자 제산선생을 만나다.

 

◆잠시 박장열군이 어떤 사람인가 소개한다. 나와 동갑으로 전북 군산출생으로 역술인협회에 감찰부장으로 재직했던 관계로 전국 철학관마다 순회하였으므로 알게 되었는데 친구처럼 말을 놓고 지내다가 88년경에 신병으로 타계한 분이다. 박군과도 얽히 이야기 소재가 많지만 고인이 되어 생략한다.◆

 

고 박장열군이 찾아와 제산선생님께서 나를 초대하셨다는 말을 전하면서 제산선생님의 명조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명조는 아래와 같다.

己丁戊乙

酉卯子亥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사주학에 관해서는 신강신약만 공부했던 기초실력이었으므로 통변하기는 어렵던 시기였으므로 아무리 명조를 뚫어져라 하고 보아도 신통한 통변은 없었지만 그때 나의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묘유충과 자묘형 해수공망과 신약하다는 것이었는데 신약하면 크게 성공할 수 없다고 배웠던 시절이었으니 신약한데도 大家가 되었다면 내 팔자도 희망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명조를 가지고 상학관찰법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이어서 박장열군에게 선생님의 생김새가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며 相貌를 그려보이며 그러냐?고 물으니 자세히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만나기를 희망하는 날이 7월 6일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그날은 미국으로 이민떠난 누님이 13년만에 고국방문차 귀국하는 날이었으므로 공항에 나가야 했기에 다음날 찾아뵙기로 했다.

 

사주를 보고 얼굴생김새를 그려내기만 하면 상학의 이론으로 그 사람의 운명을 꿰뚫어 볼 수 있었기에 사주를 보고 인상을 그려내는 연구도 끊임없이 하던 시절이었다. 사주를 보게 되면 그 인물을 알게 되고 성격도 알 수 있듯 사주와 관상의 일치함은 지금도 많이 검증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84년 7월 7일 낮 12시.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올림피아 호텔 커피숍에서 제산선생님을 처음 만나뵙게 되었다. 물론 박장열군과 동석했던 것이다. 당시에 내가 소유하고 있던 봉고차를 타고 갔는데 봉고차에 일화가 있어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정확히 12시에 도착했는데 선생님이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 제산선생님과 올림피아 호텔 사장님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절친한 사이로서 일찍부터 와 계셨던 것이었다. 수인사를 하였는데 제산선생님은 반색을 하며 맞아주셨고 만면에 희열이 가득함을 느꼈다.

 

매우 반가워하시는 구나 천성이 그러하려니 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한참 지나서는 매우 냉정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반겨주시는 것은 아마도 전생부터 무슨 인연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시므로 커피숍의자에 앉아서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木體 木形으로서 깡마른 체구에 키는 나보다 커보였고 허리가 반듯하고 바른 자세는 참선수행을 많이 했다는 것을 짐작케 했으며, 눈에는 광채가 빛났고 안색은 검었으나 頭上은 메뚜기 이마처럼 반듯하고 기백이 당당했으며 입술은 컸으나 약간 허해보였고 모발은 검고 가즈런히 가리마를 탔는데 흐트러진 곳이 보이지 않고 단정했으며 우렁찬 목소리는 가히 명리학계의 대가다운 기백이 느껴졌다.

 

본시 木體와 木相 木形은 나무의 형상으로서 피부색이 검어야 水生木하여 생기를 받게 되므로 흰색이나 황색피부보다는 검은색 피부를 大格으로 평가하는 법이다. 이때 박장열군이 나의 옆구리를 찌르며 귀속말로 “네 말이 맞았다. 네가 더 도사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전에 사주를 보고 인상을 그려낸 것이 선생님을 마주 대하고 보니 주요부위가 똑 같았던 것이다.

 

좌정하고 笑談이 시작됐는데 처음만난 어색한 관계가 아니고 전생부터 인연이 깊었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고 회고된다. 나는 개성출생으로 서울에서 성장하여 줄곧 살아왔으며 제산선생님은 경남 함양출생으로 주로 부산에서 살아오셨지만 지방색은 보이지 않았고 한집에, 아니면 이웃에 살던 분과 같은 그런 감정이었으니 이것도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그러했으리라는 생각이다.

 

점심시간이 되어 곧 자리를 물리고 일어나서 올림피아 호텔 사장부인이 경영하는 평창면옥에 가서 냉면으로 식사를 마치고 박군은 돌아갔고 제산선생님과 道談으로 시간이 흐르는 줄 모르고 밤 12시까지 이야기꽃을 피우고 돌아왔는데 주로 이야기의 내용이 修道에 관한 것이었다.

 

나도 입산수행의 경험이 있었는지라 서로 대화가 잘 통했다고 해야 할 것이지만 나는 스승없이 홀로 고행을 했던 것이고 제산선생님은 淸虛祖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지도를 받은 분이었기에 체계있는 수행담에 넋이 나간 듯 경청하게 되었다.

 

그날은 거의 내 의견보다는 제산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편이었다. 그런데 장장 12시간을 끊임없이 논리정연하게 도담과 신명의 경계 및 수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는데는 그만큼 깨닫고 아는 지식이 많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니 무궁한 선생님의 말씀에 더욱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나눈 이야기는 앞으로 기회있을 때마다 소개될 것이다. 제산선생님을 수행하게 되면서 많은 名士를 포함하여 各人을 만나봤지만 나를 만났을 때만큼 반기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나와 처음 만났을 때는 반색을 하셨고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도담을 해주신 것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밤늦은 시간이 되어 선생님을 연희동댁까지 모셔드리고는 미아리 숙소로 귀가했는데 다음날 아침 일찍 선생님께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오늘도 점심이나 하자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공부방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선생님이 지정하신 곳으로 나갔다. 연세대 정문앞에 있는 어느 식당이었는데 선생님과 주인장이 잘 아는 사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점심을 마치고 연희동 댁으로 가자고 하시므로 따라나섰다. 집에 도착하니 사모님이 계셨고 일하는 도우미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2층 서재로 올라가서 다시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그날도 저녁시간이 되도록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아래층에서 저녁식사를 하라는 전갈을 받고서야 내려와 저녁을 먹으며 사모님의 얼굴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낮에 서재에 있는 동안에는 사모님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사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사모님의 첫인상을 대한 소감은 생략한다. 훗날 소개가 될 것이기에...

 

그날 낮 서재에서 나눈 이야기 중에는 四柱學에 대한 이야기와 나의 수행경험담과 관상학에 대한 이론과 풍수지리의 이야기가 주제였는데 박장열군이 나를 제산선생님께 소개할 때 불경을 사경하며 풍수지리와 관상학과 육효에 통달했으며 사주학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진실로 사주학에 대해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전혀 통변의 묘미가 어떤 것인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선생님께서 나의 명조를 감명지에 기록해보라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보는 감명지에 정자체로 똑똑히 기록을 마치자 기록하는 방법을 설명해주시면서 흘림체를 쓰지 않는 것은 참으로 좋은 습관이라고 하시며 자기만이 알아볼 수 있게 초서체를 쓰는 것은 문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시며 칭찬인지 모를 호의를 보여주시며 선생님 자신도 한학을 공부했고 진초서를 남 못지않게 쓰지만 한번도 감명지에 흘림체를 쓰지 않으셨다며 나더러 자기와 닮은데가 있어서 좋다고 하셨다.

 

특히 명리는 분명해야 하고 남들이 잘 알아볼 수 있는 글씨체로 써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선비가 글을 못쓰면 자질을 의심받게 된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제산선생님께서 나의 명조를 가지고 통변의 이치를 설명하시는데 참으로 신비한 통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명리의 통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고백한다. 물상이론과 인과법에 대한 통변을 비롯하여 체용변에 대한 통변을 이때와 같이 感銘 깊게 들어본 일이 없었다.

 

甲辛癸癸

午未亥未

甲乙丙丁戊己庚辛壬

寅卯辰巳午未申酉戌

 

왜냐면 식신에 편인은 효신 도식이라 하며 꺼린다는 이론은 어느 명서에도 있지만 신강신약에 얽매이다 보면 식상이 강할 때는 당연히 도식이라도 爲用한다고 배워온지라 강약을 무시한 통변이 이토록 정확할 수 없었다는데 있는 것이며 아울러 未대운을 살아왔던 과거지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未土가 기신인데 계수식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丑(축산목장 즉 소를 길러야 하는데 라고 말함)으로 충거하고 子生 卯生 처자가 있어 격국을 보조하므로 망국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는데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癸水가 卯에 장생한다는 음생양사론을 듣게 되었다. 명서에도 음생양사론은 있어도 시중에서 행해지는 역술인들은 대체로 무시하는 편이었기에 교과서에 충실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됐다.

 

사실로 未대운에 나는 일산에서 畜牛농장을 잠시 경영했던 경험이 있다. 내가 농장을 경영했었다는 것은 박장열군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임자생과 을묘생이었으니 축과 자생 묘생이 우연이었을까?...

 

순간 만사 자연의 섭리라면 명리 또한 자연의 이치에 벗어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이제야 옳은 스승을 만났고 비로소 명리의 진수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한 것이리라 하며 속으로 생각하고는 제산문중에 입문할 것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대운수가 한해 늦춰지는 이치를 듣게 되었고 금년부터 戊運이 시작됐으니 무계문명지상으로 스승을 따르게 될 것이며 미래의 巳火운과 丙火운에는 교주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사실상 巳대운들어 난명학회를 창설하였고 丙대운에 대야농장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는 교주가 되었던 것이니 진실로 시중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통변에 신비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제산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글쓰는 솜씨가 자신과 닮았고 얼굴도 깡마르고 못생긴 것이 닮았으며 수도를 좋아하며 학문을 추구하는 정신도 같을뿐더러 성격이 뻴쭉난 것도 자신을 닮았다는 것이었다.

 

뻴쭉났다는 방언은 선생님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비판적이며 도도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뜻일 것이다. 이어 바위도 평퍼즘하면 사람들이 앉아 놀기를 좋아 하지만 역사에 남길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으며, 금강산 뾰족한 바위는 앉아 쉬지는 못해도 역사에 기리 남기는 사진을 찍는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대중적이지는 못하지만 정신은 길이 남길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다. 그날도 밤늦게 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귀가하려는데 내일을 기약하지 않으셔서 후일을 기약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마지막으로 격려의 말씀으로 덕담을 해주시는 것이었다.

 

車선생은 앞으로 수행을 마치고 부산에 앉으면 현해탄이 육지로 변할 것이며 서울에 앉으면 장안이 호수로 변할 것이요, 동서양삼국을 누비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좋았는데 공부를 마치고 부산에서만 상담을 했기에 말씀과 같이 일본에 많은 인연들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실로 미국으로 이민하여 동서양 삼국에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후 서울엔 인연을 맺지 않았다. 만약 서울로 진출했다면 어떤 현상이 생겼을까?...

 

다음날 아침 미아리 숙소로부터 출근하여 공부방에 들어서자 선생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이날도 만나자고 하시면서 선생님께서 직접 신촌 공부방으로 오시겠다는 것이었다. 이틀이나 사무실을 비웠기 때문에 나를 찾는 손님들 십여명이 대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학문의 진수를 맛본 나로서는 도저히 상담을 할 수가 없었다. 미숙한 지식으로 양심상 고객상담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며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며 떠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도착하실때까지 두어시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안에 있었는데 손님들은 그때까지 발걸음을 옮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선생님의 통변을 들은 이후 인생상담을 한다는데 겁이 났고 나는 이제부터 다시 공부를 해야 하므로 상담을 할 수 없다고 재차 돌아가라고 하자 이구동성으로 아우성이었다.

 

그 중에는 무당들도 있었고 동대문 방배동 등 먼 곳에서 나를 만나러 왔는데 나는 공부가 부족하니 공부 좀 더 하고 오겠노라고 하자 대부분의 문객은 자기는 어느 선생보다 나에게만 상담을 하겠노라고 억지를 쓰기도 했다. 그럭저럭 두어시간이 지났을까 제산선생님이 도착하셨던 것이다. 기다리던 문객들에게 좋은 시험대가 되었으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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